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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운동을 기념하라.”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국국민당이 1936년 6월10일 6·10만세운동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선언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정부가 6·10만세운동을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한 1년 반 전의 일이다. 사학자인 친구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집에서 발견했다면서 선언서를 e메일로 보내왔다.
선언서를 읽는 순간 지난 2년 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의문 중 하나가 풀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2018년 말 기념사업회 결성에 참여해 국가기념일 지정 등을 추진하면서도 ‘이념을 초월한 독립운동’이라는 사학자들의 말에 마음속 한구석에는 ‘진짜?’라는 의문이 숨어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이 6·10만세운동을 일으켜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거리를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한국국민당의 선언서는 그러한 의구심을 해소해 주었다.
백범 김구는 1935년 11월 중국 난징에서 임시정부가 난파 위기에 처하자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단체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이동녕 송병조 조완구 차리석 김붕준 안공근 엄항섭 이시영 조성환 등 민족주의 인사들과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고 <백범일지>에서 밝혔다. 한국국민당이 임시정부의 여당인 셈이다. 임시정부는 당시 일제의 상하이 침략으로 상하이에서 항저우 등을 거쳐 난징에 있었다.
모두 876자로 된 선언서는 3·1운동 이후 “8년 만에 그 불꽃이 땅 위로 다시 폭발하면서 청천의 벽력과 같은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다시 일어나니 이것이 6·10운동”이라고 규정했다. 6·10만세운동을 제2의 3·1운동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한국국민당 선언서는 6·10만세운동의 계기가 됐던 순종의 장례식에 대한 시각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수십만 군중의 눈물을 순종 개인이 아니라 “20년 가까운 긴 세월이 쌓이고 쌓인 망국한을 못잊히어 통곡하던 것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러한 시각은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순종의 승하 5일째인 1926년 4월29일 돈화문 앞에서 쓴 시 ‘통곡 속에서’의 시각과 비슷하다. 심훈은 시에서 “쓰러져 버린 한낫 우상”이라고 순종에 대해 직격탄을 쏜 뒤 “목매어 울고자하니 눈물마저 말라붙은” 망국의 슬픔을 토했다.
선언서는 끝에 “계속하여 악전고투하고 있는 우리는 6월10일을 기념치 아니할 수 없으며 그 기념을 기념답게 하려면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우리 자신이 남보다 먼저 최전선에서 왜적을 충살(衝殺)하기를 더욱 굳게 결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6·10만세운동이 올해로 발생 96주년, 해방 77주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대중에겐 잊힌 존재다. 비록 18개월 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지난해 처음으로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가 치러졌지만 6·10만세운동은 여전히 찬밥 신세다.
우선 자료조사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 1차 자료인 수사기록, 재판기록 등은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100년 전 일본어, 그것도 법률용어로 쓴 수기 기록들을 번역하는 작업은 상당히 전문적인 수준의 사람들이 참여해야 가능한데 아직 꿈조차 꾸지 못하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일부분을 번역해서 소개했을 뿐이다.
6·10만세운동 당시 국내에서 발행된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과 일제 기관지인 매일신보(한글), 경성일보(일어), 서울프레스(영어) 가운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데이터베이스화되었으나 나머지는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다. 잡지도 마찬가지다.
당시 일본의 신문이나 잡지의 보도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국도 대표적 문인인 칭화대 교수 주쯔칭(朱自淸)이 1926년 7월 한 잡지에 발표했던 장편시 ‘조선야곡’이 1990년에야 조선 동포 교수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정도다.
자료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다 보니 학계의 연구에 빈자리가 너무 많다. 학계는 일반적으로 6·10만세운동의 주동세력을 고려공산청년회-천도교, 사직동계(조선학생과학연구회 계열), 통동계로 꼽는다. 이 중 고려공산청년회와 사직동계는 어느 정도 연구되어 있으나 민족주의 계열로 꼽히는 통동계는 사실상 연구가 전무한 상태다.
한국국민당의 선언서는 다음과 같이 끝내고 있다. “혁명 동지여 이날을 어찌 무심히 지내랴.” 백범의 지적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