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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339회 작성일 2021-10-12 09:32
국가보훈처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권덕규(중앙고보 국어선생님, 조선어학회 회원,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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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류(崖溜) 권덕규(權悳奎)는 1891년 8월 7일 현재의 김포인 통진군(通津郡) 하성면(霞城面) 석탄리(石灘里)에서 안동권씨 권인수(權寅壽)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안동권씨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지는 명문 양반 가문이므로 그 역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삶은 20세가 된 1910년 서울 휘문의숙(徽文義塾) 입학으로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조선의 주권이 침탈되던 시기, 한글운동의 최고 권위자로 휘문의숙에 출강하던 주시경(周時經)을 만나 사제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권덕규는 일찍부터 한글연구에 입문하였다. 더불어 한국 고유의 고전을 정리하고 간행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사업에 관여하였다.


이곳에서 김두봉(金枓奉)·이규영(李奎榮)과 함께 주시경을 도와 최초의 한글 사전『말모이』편찬에 참여하였다. 권덕규는 오직 한글 보존의 일념으로 추진된『말모이』편찬을 1914년 주시경 사망 이후에도 이어갔다. 이는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족과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시련, 그리고 1947년 국어사전인『조선말 큰사전』간행을 향한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1913년 휘문의숙 4년 과정을 졸업한 권덕규는 조선광문회 사업에 매진하는 동시에 주시경이 설립한 한글교육 기관인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 입학하였다. ‘한글모’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 기관에서 후일 한글운동의 중심이 되는 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권덕규는 1912년에 중등과를, 1913년에 고등과를 각각 1회로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곧바로 강습원 중·고등과의 교사가 되어 한글을 교육했다.


1916년 4월에 한국어 학회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에 합류하여 김두봉·이규영·장지영(張志暎) 등 동료들과 함께 의사원(議事員)에 선임되었다. 이때 조선광문회 운영을 주도한 국학자 최남선(崔南善)과 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유근(柳瑾)을 만났다. 이를 통해 국학(國學)의 양 기둥인 한글과 한국사에 대한 깊은 조예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후일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 입교와도 연결되었다.


권덕규는 29세가 된 1919년 9월에 평산(平山)이 본관인 신현순(申鉉順)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한글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활발한 언론·출판·교육활동을 벌였다. 초기에 그의 이름을 알린 본격적인 계기는《매일신보》와 《동아일보》지면에 투고한 한글연구 개론과 유학(儒學) 비판 논설이다.


먼저 1919년 12월 24일부터 1920년 1월 7일까지 8회에 걸쳐《매일신보》연재한「조선어문(朝鮮語文)에 취(就)하야」라는 논설로 한글연구 이론을 강의했다. 본 논설에서 권덕규는 본인이 정립한 이론 체계를 분야별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시작은 국어사(國語史) 정리로 표음문자인 국어의 가치와 언어적 우수성을 평가하였다.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 이전부터 한국인만의 고유한 문자가 존재했다고 주장하였다. 중국과 구별되는 한국만의 고유한 문자체계와 어원이 훈민정음 창제 시기에 정비되었다는 견해였다. 현재 한글 사용의 단점을 논하면서 ‘종횡간(縱橫間) 서법(書法)’ 즉 가로쓰기의 도입을 주장한 것도 특징적이다. 이는 스승 주시경의 주요 주장을 계승하고, 대중에게 보다 편리한 글쓰기 방식을 제안하는 실용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다음으로 1920년 5월 8일자 동아일보에「가명인두상(假明人頭上)에 일봉(一棒)」이라는 제목으로 도전적인 논설을 실었다. 여기서는 중국을 추앙하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은 유학자들을 ‘가명인(假明人)’으로 통칭하며 비판했다. 한국의 문화가 유림의 사대주의(事大主義)적 경향으로 인해 쇠퇴했다는 비판이었다. 권덕규의 사상과 학술 견해는 분명한 국수주의(國粹主義)와 민족주의 성향을 지녔다. 한민족이 지닌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중시하고, 그 계승과 발전을 시대적 과업으로 인식했다.


1921년 8월 27일 동아일보사 주최 강연회에서「조선역사(朝鮮歷史)와 백두산(白頭山)」을 강연한 이래, 전국 명승고적(名勝古跡)을 답사한 답사기를 여럿 남기기도 하였다. 그 결과 1924‧1926년에 한국사 통사(通史)인『조선유기(朝鮮留記)』상하(上‧下)권을 저술하였다. 이는 현실적이고 다원화된 문화현상을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상정하는 ‘문화사학(文化史學)’ 사관이 담겨 있었다.


같은 시기에 권덕규의 한글연구와 학문적 성과, 한글 보급운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20년 4월부터 1924년까지 모교인 휘문학교의 조선어 촉탁과 교사로 근무한 점이 큰 이점이 되었다. 그는 한글 연구의 요람인 휘문에서 1921년에 조직된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의 간사로 선임되었다. 이로써 동료 학자인 최두선(崔斗善)‧장지영‧이승규(李昇圭) 등과 함께 한글 연구와 보급을 지속했다.


조선어연구회는 1908년 8월에 주시경을 중심으로 조직된 최초의 한글 학회인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를 계승했다. 나아가 후일 조선어사전편찬을 주도하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한글운동의 명맥을 잇는 학회였다. 학회는 ‘조선어의 정확한 법리(法理)를 연구함’을 규약으로 밝히고 과학적인 국어연구 방식 추구를 표방했다. 아울러 설립 취지는 다음과 같다.


언어가 실로 모든 문화운동의 근본 조건이 되며 기초요건이 되는 것은 물론이라. 그런즉 이 기초적 조건이 되는 조선의 문법과 언어가 불안전하고서 그 무슨 완전한 시와 소설이 만들어지며 완전한 도덕과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발달 하겠는가. 그럼으로 우리는 조선인의 문화발달은 그 문법과 언어의 발전에 기초하야 이에 비로서 그 결과를 가히 기다릴 것이라 하노라


위 취지에서 조선어연구회는 언어의 위상을 학술적 어학 연구와 실용적 언어 사용 수준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언어를 도덕과 종교, 정치 발달을 촉진하는 문화운동의 근본 조건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동일하게 한글 문법과 한국어의 발전을 한국인 문화 발전의 기초로 여겼다. 이는 한글운동의 파급력을 한국 문화운동과 자주성 보존 전반으로 확대한 시각이다.


실제로 조선어연구회의 영향력은 학계와 사회 전반으로 파급되었다.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인 1926년 11월 4일에 조선어연구회가 중심이 된 한글반포 기념식이 오늘날 한글날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동광(東光》을 비롯한 당시의 여러 잡지가 조선어연구회가 주장한 맞춤법 표기를 채택하였다. 1927년에는 권덕규 등의 주도로 최초의 한글 전문 잡지를 표방한《한글》이 발간되었다.


1923년에는 권덕규의 한글연구 이론이 집약된『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가 발간되었다. 이 저서에 권덕규의 한글 이론과 어원(語原) 연구 성과가 집대성되었다. 이는 한국어와 한국문화가 탄압받던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한국어 이론서이자 교과서로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권덕규가 음운학‧구조학 연구 흐름과 구별되는 어원(語源) 연구에 집중한 점이 특별하다.


저서에서는 크게 고어‧궁중어‧알타이계 어휘 비교와 어원 탐구가 이루어졌다. 이는 과거 문헌을 참고하여 대조한 것으로 고문헌을 고증한 권덕규의 국어연구 경향을 보여준다. 더불어 한글의 어원탐구를 통해 한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사상을 추적하는 강렬한 민족의식의 표현이기도 했다.


1924년에 휘문학교 교사 생활을 마감한 권덕규는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의 조선어 교사로 근무했다. 1927년에는 중앙고보의 교지《계우(桂友)》발간을 주관하였고, 7년간 중앙고보 동창회의 학예부장직을 담당했다. 1931년에는 다시 언론계로 자리를 옮겨 4월 20일 교사직을 사임하고《조선일보》촉탁으로 입사하였다.


권덕규는 교사 근무 기간 동안 한글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26년에는 한글학자 박승빈(朴勝彬) 등과 함께 맞춤법 확립 운동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정음회(正音會)를 조직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준비위원회에도 참여하였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조선 어문 공로자 권덕규 관련 기사(동아일보 1930년 9월 5일자 기사)

조선 어문 공로자 권덕규 관련 기사(동아일보 1930년 9월 5일자 기사)

이후 1931년부터 1934년까지 3년간 조선어학회와 동아일보사가 주관하는 하기(夏期) 조선어강습회의 강사로 참여했다. 국어체계화 추진과 문자보급이 목적이었다. 영남 지방부터 북쪽 관서‧관북 지방에 이르는 전국을 오가며 조선어 강습과 대중강연, 한글 관련 좌담회 연사로 활동했다. 북선(北鮮) 지역인 황주(黃州)‧진남포(鎭南浦)‧평양(平壤)‧철원(鐵原)‧원산(元山)‧함흥(咸興) 지방 전담 순회 강연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적에 힘입어 권덕규는 1930년 동아일보가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한 특집 기사에서 ‘조선어문 공로자’로 선정되었다.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공적을 평가하였다.


일찍이 경성 휘문의숙을 졸업하신 후 주시경씨 때 조선어 연구회에서 많은 연구를 하였고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에 광문회에서 “말모이(사전)”을 편집한 것을 비롯하여 경향 각지에서 개최되는 한글강습회에 강사로 초빙을 받은 일이 많았음으로 각 지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휘문고보와 중앙고보(中央高普)에서 십여년동안 한글과목을 담임하여 지금까지에 이르는 동안 꾸준한 연구가 있었으며 현재는 조선어연구회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처럼 당시에도 권덕규가 1920~30년대에 걸쳐 꾸준히 한글운동에 기여한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이후에도 언론계에 칼럼을 꾸준히 투고하며 한글학과 역사, 수필에 걸친 다양한 문필 활동을 이어갔다.


권덕규는 한글보급운동을 활발히 했지만 한글맞춤법 제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총독부는 1907년 대한제국 내의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와 주시경이 3년간 마련한 맞춤법통일안을 무시했다. 그리고는 1912년 4월「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제정‧공포를 시작으로 1920~30년간 총독부 주도하의 관제적인 한글 맞춤법 제정을 추진했다. 이는 개화기에 새롭게 부상한 한글을 근대적인 언어체계로 정비하려 한 민족적 노력을 억압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인 스스로 고유한 한글맞춤법을 확립하고 사전을 편찬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한국인 고유의 전통과 자주적 의식을 지키기 위한 민족적 과제에 해당했다. 이에 1910년 조선광문회에서『말모이』가 집필된 이래 한글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권덕규 역시 그러한 민족과제 수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1월 2일에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 발기총회가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에서 개최되었다. 사회‧학술‧문화계 유력인사들과 더불어 권덕규가 한글사전편찬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때 다음과 같은 성명이 발표되었다.


조선민족이 다시 살아날 지름길로는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선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문화를 촉진하는 방법으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실현할 최선의 방법은 사전을 편성함에 있는 것이다.


성명에서 보이듯 한글사전 편찬은 한민족의 문화 유지 차원에서 강조되었다. 그 연장에서 일제의 민족말살통치라는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한글사전 편찬이 제안되었다.


1931년 1월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개칭되면서 본격화한 한글맞춤법 제정과 표준어 사정(査定), 외래어 표기법 확립 등은 사전편찬을 위한 선행 과제였다. 권덕규는 조선어학회 주요 위원으로 그 같은 사업추진을 주도했다.


구체적으로 1930년 맞춤법 제정위원으로 참여하고, 1932년 12월 24일 한글학자 17명과 함께 조선어철자위원회(朝鮮語綴字委員會)를 조직했다. 권덕규는 이때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며 한글강연회를 위해 전국을 오갔음에도 한글 표준어 확립을 위한 토의에 꾸준히 참여했다.


기나긴 숙고와 토의를 거쳐 1933년 1월 6일에 문법과 성음(聲音)을 규정한 한글통일 원안(原案)이 작성되었다. 이어서 권덕규가 최현배(崔鉉培)‧이극로(李克魯)‧김윤경(金允經)·신명균(申明均) 등과 함께 수정위원에 임명되어 후속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33년 10월 19일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 마침내「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통과되었다. 이는 권덕규를 비롯하여 최현배‧이극로‧김윤경‧이만규(李萬圭)‧장지영 등 국내 한글학자 18인의 3년에 걸친 120여회의 토의 끝에 이뤄낸 소중한 결실이었다.


이어서 조선어학회는 1935년 1월부터 올바른 표준어 어휘 사용법을 확립하기 위한 표준어 사정 작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36년에 표준어 어휘집인『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간행되었다. 1940년 6월에는『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이 결정되면서 외국어 한글 발음과 단어 용례의 표준도 확립되었다. 조선어학회의 이 같은 성과는 한글 사용의 표준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어사전 편찬의 토대를 구축했다.


권덕규도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에서 발족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朝鮮語辭典編纂委員會)’에 이극로·이윤재(李允宰)·정인승(鄭寅承) 등과 더불어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 같은 상승세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침략을 본격화한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咸鏡南道) 홍원(洪原) 경찰서는 민족정신 교육 혐의로 영생고등여학교 교사이자 사전 편찬 참여자인 정태진(丁泰鎭)을 출두시켜 가혹하게 고문했다. 그 결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운동 단체라는 취지의 허위자백을 받아 냈다. 이를 빌미로 10월 1일 일제 경찰이 서울의 조선어학 회관을 급습하였다. 이에 이윤재·최현배·정인승·장지영·김윤경·이극로 등 11명이 구속되어 함흥과 홍원으로 압송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다음해인 1943년 3월 6일까지 조선어학회 관계자 17명이 추가로 구속되었다.


이때 권덕규는 와병 중인 탓에 구속되지 않았다. 권덕규의 건강은 1940년부터 중풍으로 인하여 악화되었다. 1942년 당시에도 거동이 어려운 상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에따라 권덕규는 경찰에 불구속 입건되었고, 1943년 4월에 기소정지 처분을 받았다. 1910년대부터 함께한 동지들의 수감과 오랜 숙원인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의 중지라는 크나큰 시련을 신체의 병마와 함께 감내해야 했다.


비록 사전 편찬의 성과가 이어지진 못했지만,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체계 정립과 한글보급 운동은 민족문화 수호의 일부분을 담당한 주요한 민족운동 흐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일제강점기 한글운동은 단순한 어학운동의 의미를 넘어 민족보존과 자주독립을 목표로 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940년대 일제의 경제수탈과 총동원체계 확립, 민족언론 폐간 등의 억압에 권덕규를 비롯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필봉(筆鋒)의 의지로 저항했다. 한글 이론 체계화와 선각자적 지성, 그리고 민족문화 부흥의 신념이 그 수단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1930~40년대 권덕규의 적극적인 항일운동과 저항정신이 지닌 독립운동사적 가치가 드러난다.


1942년 조선어사건 이후 권덕규의 활동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1930년에 아끼던 외동아들이 사망하고, 1942년부터 동지들이 수감되는 시련이 이어지자 그의 활동 범위가 축소되고 건강 악화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권덕규의 학술, 사회 활동이 재개되었다. 먼저 해방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귀국을 촉구하고 환영한「국민대회취지서 국민대회 준비회 선언」에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1945년에 역사서『조선사(朝鮮史)』를 간행했다. 이는 그가 1924·26년에 간행했던『조선유기』상·하를 1929년에『조선유기략(朝鮮留記略)』으로 대폭 축약해서 간행한 것을 다시 펴낸 저서였다. 이어서 1945년 11월 25일부터 해방을 맞이하여 출감한 동지 이극로·김윤경과 함께 국사국어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946년 3월 4일에는 부인용 잡지인『우리집』간행 편집 위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에 그동안 집필한 수필과 기행문 등을 종합한『을지문덕(乙支文德)』을 발간했다. 이처럼 대외활동을 재개하던 권덕규는 1950년 3월 5일 서울 흑석동(黑石洞) 58번지 자택에서 나간 후 실종되었다. 그외에 정확한 사망 지점이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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