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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6.10만세 독립운동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6.10만세 사건이란 조선조 마지막 임금이셨던 융희황제(隆熙皇帝,묘호순종(廟號純宗)의 인산(因山)일이던 1926년 6월 10일 있었던 독립 만세운동이다.
우리 국민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일재 강점기의 주요한 독립운동으로 3.1 독립 만세운동. 6.10만세 사건, 광주학생사건, 삼랑진 학생 사건 등이 있었던 것으로 배웠다.
내가 기억하건데 광주학생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1961년 5·16 이후 5.16 주체 세력에 의해 ‘반공의식’이 강조되면서 ‘일제 강점기에 공산당에 의해 주도되었던 6.10만세 사건을 슬그머니 교육현장에서 사라졌고 그 결과 사람들에게서도 잊혀졌었다.
6.10만세 사건은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숙항(叔行:정확히는 17촌) 莫難) 權五卨선생이 이 운동의 거사준비 책임자였고 그 외에도 중앙 고보 출신인 족숙(族叔: 정확히는 13촌) 2분, 권오상(權五尙), 권오운(權五雲)이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권오설 선생은 6.10만세 독립운동 3일 전인 6월 7일 일경에 체포되어 20개월의 미결 수 생활 후에 7년 구형에 5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그후 감형이 되어서 1930년 7월 출소를 100일 앞둔 4월 17일 옥사하셨다.
어렸을 때 어른들께서 쉬쉬하시며 말씀하신 것을 토막 토막 이어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진상은, 일제가 하도 심하게 고문을 해서 그 시신이 참혹하기 짝이 없어서 가족도 보지 못하게 철관에 넣고 용접을 한 후 봉분조차 없는 평장으로 할것을 강요했다는 것이고, 매장 시에도 일제의 통제 아래 집안사람 몇 명만이 간신히 참석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돌던 그 이야기가 노무현 정권시절에 좌익게열 독립운동가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하면서 개장을 하는 과정에서 유령처럼 소문으로 떠돌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 되었다. 비록 심하게 녹이 슬었지만, 납땜을 한 철제관(소나무 재질의 사과 궤짝 같은 송판으로 만든 나무 관에 철판을 두른 뒤 납땜을 한 것)이 발견된 것이다.
이 철관은 지금 안동시 임하면에 있는 경상북도 독립기념관의 ’독립관‘에 전시되어 있다.
왜 일제는 선생의 주검을 철관으로 가뒀던 것일까? 선생의 부친인 권술조 선생이 쓴 제문에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권술조 선생이 '이 관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묻을 수 없다'고 버텨서 어쩔 수 없이 납땜을 한 관을 열어보았다"라면서 "얼굴에 독을 쓴 자국이 역력했다.“는 대목이 있다.
결국 고문 흔적을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제 경찰은 철관을 바꾸지 못하도록 했고, 공동묘지에 무덤의 위치도 정했다. 또 봉분도 쌓지 못하게 한 뒤 6개월여 동안 밤낮없이 묘지를 감시했다.
"부친 장례식날에 일제 경찰은 작업 인부 몇 명과 가족 등으로 인원수를 제한했어요. 그날 풍산에는 까마귀 떼(제복 입은 일본 순사)가 바글바글했고, 안동에서 가일마을까지 50리길에도 까마귀 행렬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왜 그랬겠어요? 그냥 놔두면 장례행렬이 제2의 만세운동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겠죠."(권대용)
(오마이뉴스 기사 일부 인용)
권오설 선생이 체포되는 바람에 계획에 조금 차질이 있었지만, 당시 중앙 고보에 재학 중이던 예안 부포의 이선호선생이 격문을 재인쇄하고 뿌리면서 서울의 여러 학교 학생들이 합세해서 6.10만세 독립운동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독립운동사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사건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함께 사진을 찍은 분중 가운데 분은 이선호선생의 자제이며 중앙고등학교 선배이신 이원정 선생이다.
2019년 서울 중앙 고등학교에서 3.1절 기념식 후에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