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예선 중국전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킨후. 오른쪽은 황선홍 ⓒ일간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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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년 무렵부터는 한국 축구 최고의 스타로 확실히 자리 매김한 것 같습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이후 대표팀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고,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에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체제로 들어가면서 제가 스포트라이트를 크게 받게 됐지요.
-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는 우리 대표팀이 무패를 기록하며 본선 진출을 결정지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본선에서는 3전 전패로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실패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말씀하신대로 아시아 예선에서는 성적도 좋았고, 경기 내용도 괜찮았습니다. 선수들의 도전 의식이 상당히 강했구요. 게다가 몇몇 선수들은 86년 월드컵에 출전했던 경험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지요.
그런데 마음만 앞섰지 4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게 별로 없었습니다. 특히 정보력이 너무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월드컵 나가서야 저희가 압박 축구란 걸 처음 경험했어요. 경기 중에 상대팀 선수들이 압박을 가해 오는데 어떻게 풀어나갈 지 모르겠는 거예요. 정말 당황스럽더라구요. 아시아권 나라하고 할 때와는 너무 많은 차이가 났습니다.
- 당시 우리 대표팀이 이탈리아 현지에 너무 늦게 들어가지 않았나요?
선수들의 기량도 문제였지만 행정력도 정말 부족했습니다.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어요. 예를 들어, 선수단이 현지에 언제 들어가야 좋을지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른 거예요. “빨리 가서 적응을 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너무 일찍 들어가면 선수들이 권태로움을 느낄 수 있으니 경기일 직전에 들어가는 게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 이탈리아 대회 때 국민들이 김주성 부장님에게 정말 큰 기대를 걸었는데 예상 외로 부진했습니다. 역시 부담감 때문이었나요?
정말 엄청난 부담감이 있었습니다.(웃음) 사실 컨디션도 썩 좋질 않았어요. 아시아 예선 때부터 부상 때문에 고생을 했거든요. 부상이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본선에 간 겁니다. 좋지않은 몸 상태에다 ‘내가 잘해야 된다’는 중압감까지 있으니까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한 거지요.
- 여담입니다만,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김주성과 최순호는 서로 어시스트를 안해준다’ 하는 식으로 두 분 사이가 안좋다고 했는데요.
언론에서 만들어낸 기사지요. 순호 형은 당시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였잖아요. 미드필더로도 좋은 활약을 보였구요. 순호 형은 주로 가운데 쪽에서 많이 움직였고, 저는 측면에서 움직였는데 호흡이 안맞는다던가 일부러 서로 어시스트를 안해준다던가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 부장님 개인적으로 86년 월드컵 대표팀과 90년 월드컵 대표팀 중 어느 팀이 더 강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86년 월드컵 멤버가 강하지요. 그 멤버는 한국 축구 사상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32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해서도 그 정도의 경기 내용을 보여준 거지요. 비록 1무 2패를 했지만 세 경기 모두 잘 했잖아요.
- 이탈리아에서는 부진했지만 이듬해 1991년 시즌에는 대우를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기록을 보니까 37경기에 14골을 기록했군요.
월드컵에서의 부진을 만회하려고 그때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부상도 완쾌가 된 상태라서 컨디션이 매우 좋았습니다.
- 1992년에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에 입단을 하셨죠.
그때는 해외진출을 하고 싶어도 병역 문제와 여러가지 사정으로 가기가 힘든 때였습니다. 저는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기 때문에 병역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병역 혜택을 받더라도 5년간은 해외 진출이 금지됐었습니다. 제가 80년대 말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미국의 몇몇 클럽에서 프로포즈를 받았는데도 그것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91년 말에 독일의 뒤스부르크에 가서 입단 테스를 받고,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뒤스부르크에서 계약을 하자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그때까지 신병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계약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귀국을 해서 92년 초에 4주 신병 교육을 받고 나서 8월에 뒤스부르크가 아닌 보쿰에 입단을 하게 된 겁니다. 더 늦기 전에 유럽 리그에서 뛰고 싶어서 간 거지요.
- 당시 보쿰의 전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제가 입단했을 때 2부에서 1부 리그로 막 올라온 팀이었기 때문에 전력은 약한 편이었어요. 공격형 미드필더로 두 시즌(92-93, 93-94 시즌)을 뛰었습니다. 2년 동안 35경기에 출전해서 4골을 넣은 걸로 기억합니다. |
| -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을 때가 28살쯤인데, 그 정도 나이면 해외 리그에 진출한다고 해도 테크닉 면에서 큰 발전은 없지 않나요?
맞습니다. 테크닉 면에서는 크게 좋아지질 않아요. 대신 축구에 대한 생각은 많이 바뀔 수 있지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독일에서 느낀 것 중 하나가 해외 클럽에 입단을 하게 되면 융화에 큰 신경을 써야된다는 겁니다. 독일 사람들 자체가 굉장히 배타적이라서 내가 먼저 다가서야겠더라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기장에서의 실력으로 자신을 보여줘야 됩니다.
- 보쿰 소속으로 94년 미국 월드컵에 참가하셨는데, 86, 90년 대회 때와는 느낌이 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미국 월드컵 때는 제가 팀에서 (최)인영이 형 다음으로 고참이었기 때문에 선수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지요. 두 번째 볼리비아와의 경기는 저희가 이길 수 있었고 또한 이겨야만 했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경기였어요. 독일과의 마지막 경기도 아쉽구요. 그 때 시간만 조금 더 있었으면 역전도 가능했을 겁니다. 월드컵 1승이 정말 어렵긴 어렵더군요.(웃음)
- 분데스리가에서 두 시즌을 뛰고, 94년 가을에 대우로 복귀했는데 독일에서 더 뛰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93-94시즌 끝나고 보쿰에서 저에게 재계약을 하자고 했고, 저도 그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대우가 10연패를 당하면서 팀이 매우 침체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흔들리더라구요. 대우에서도 들어와 달라는 요청을 자꾸 해왔습니다. 고민 끝에 9월에 귀국을 해서 대우에 복귀를 하게 된 거지요.
- 대우로 복귀한 후, 곧바로 포지션을 스위퍼로 옮긴 건가요?
아닙니다. 처음 복귀한 뒤에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어요. 그러다가 오른쪽 무릎 부상을 당했습니다. 독일 가기 전부터 무릎이 아팠는데 그때는 정밀 검사를 받아보질 않고 그냥 참고 뛰었어요. 대우에 복귀한 뒤에도 상태가 너무 안좋은 거예요. 정밀 검사를 받아봤더니 무릎 연골이 찢어졌다고 하더라구요.
그 때문에 경희 의료원에서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트레이닝은 태능 선수촌에서 했습니다. 무릎 수술 후 4개월을 쉬었어요. 95 시즌을 앞두고 동계 훈련할 때 은퇴까지도 생각을 했었습니다. 스위퍼로 뛰기 시작한 건 95년부터일 겁니다.
- 스위퍼로 포지션을 옮기게 된 건 스스로 원했던 겁니까? 아니면 김희태 당시 감독님이 권유를 한 건가요?
김희태 감독님과 저 그리고 팀에서 의견 일치를 보고 결론을 내린 겁니다. 결정적인 원인은 무릎 부상 때문이라고 봐야지요. 운동 선수들이 심한 부상을 당하게 되면 아픈 부위 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면과 심리적인 면에 더 큰 타격을 받습니다.
축구에서 공격수는 투쟁력과 파괴력이 필수 조건이거든요. 하지만 무릎 수술을 했기 때문에 공격수로서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내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부상이 회복될 때까지만 스위퍼를 볼 생각이었는데 이후에 완전히 스위퍼로 자리를 굳히게 된 거지요.(웃음)
- 공격수 시절에도 수비력이 좋은 편이었던 같은데 본격적으로 스위퍼를 보니까 어떻던가요? 적성에 맞았습니까?
처음엔 상당히 당황했습니다.(웃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공격수였고, 수비를 본 적은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공격수는 능동적인 반면에 수비수는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수비수는 순간적인 판단 능력이 매우 뛰어나야 됩니다.
수비수는 생각을 하고나서 움직이면 안돼요. 그 때는 이미 늦은 겁니다. 생각과 움직임을 동시에 해야되는데 그 부분이 처음에 어렵더라구요. 그나마 제가 공격수 시절에도 수비력이 좋은 편이었고, 발이 빨라서 비교적 적응기간이 빨랐다고 볼 수 있지요.
스위퍼(리베로)라는 포지션이 정말 큰 매력이 있더군요. 공격수로서 골을 넣었을 때 보다 오히려 더 큰 쾌감이 있더라구요. 스위퍼는 최후방에서 미드필드와 최전방에서 뛰는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잖아요. 특히 우리 팀의 미드필더들과 최전방 공격수들이 좋은 플레이를 펼칠 때는 뿌듯합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밥 잘 먹는 모습만 봐도 기특하잖아요. 마치 그런 느낌이었습니다.(웃음)
- 96년 아시안컵에서는 중앙 수비수로도 뛰었고, 공격수로도 뛰셨지요? 그렇습니다. 매 경기 포지션이 달랐어요. 어느 경기에선 스위퍼로 뛰고, 또 어느 경기에선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뛰었구요. |
| - 그 대회에서 한국이 이란에게 6 대 2로 대패하는 등 실망스러운 결과를 냈는데, 가장 큰 패인이 무엇이었을까요?
이란에게 6 대 2로 패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축구팬 여러분들께 면목이 없습니다. 아마도 한국 축구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난 다음에 당한 사상 최악의 참패일 거예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선수들끼리 융화가 잘 안됐던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고참인 저도 책임이 있지요. 국가대표 선수는 무엇보다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어야 된다는 걸 그 때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 대회 후 이런저런 말이 있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도 ‘선수들이 박종환 감독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말같은 거요.
그런 말이 나온다는 자체가 융화가 안됐다는 증거지요. 어떤 종목이든 그렇지만, 특히 대표팀 내에선 불협화음이 있어선 안됩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를 절대 낼 수가 없어요. 선수들이 감독에게 불만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밖으로 표출이 돼서는 곤란해요. 더구나 대회 중에는요.
- 97년 K리그에서 부산 대우가 우승을 차지했을때 스위퍼로서 MVP까지 수상했습니다. 수비수가 MVP를 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생각되는데요.
정말 기뻤습니다. 특히 제가 팀의 주장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더 컸지요. 그리고 MVP는 프로 입단 후 처음 받는 거였거든요. 재미있는 게, 제가 부산 대우 시절에 리그 우승을 세 차례 경험했는데 묘하게도 우승한 시즌에는 제가 전 게임을 뛰었습니다.
- 그 무렵 스위퍼로서 멋진 활약을 보이자 ‘98년 프랑스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시켜야 된다’는 팬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솔직히 프랑스 월드컵에 가고 싶었습니다.(웃음) 월드컵은 노장 선수, 신예 선수 할 것 없이 다들 뛰어 보고 싶은 무대잖아요. 저같은 경우엔 이미 월드컵을 세 차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애절한 심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또 한번 월드컵 무대를 밟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경험을 살려 대표팀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97년 시즌에 우승할 때 전게임에 출장했고, 컨디션도 상당히 좋았고, 마음가짐도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대를 했던 게 사실입니다.(웃음) 하지만 선수 선발은 감독의 절대적 권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요.
-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본인에게 가장 적합한 포지션은 어디입니까?
측면 공격수가 가장 어울리고, 또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좁은 공간에서 아기자기한 플레이를 하기보다는 측면에서 시원하게 돌파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좁은 공간에서의 플레이는 (이)태호 형이 정말 잘 했지요.
- 큰 체격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몸싸움을 절대 회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승부 근성이 강한 편입니다. 부딪히는 걸 두려워하질 않았어요. 아무래도 제가 어릴 때부터 힘든 환경에서 강하게 자라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무명 시절을 오래 겪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웃음)
- 98년도였던가요, 수원 소속이던 데니스(이성남) 선수가 경기중에 김주성 부장님 머리를 밟아 한바탕 싸움이 난적 있었죠. 나중에 데니스와 화해했습니까?
뭐, 화해랄 게 있습니까. 경기 하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순간적으로 화가 나긴 했지만 그때도 데니스 선수 개인에 대해 아무런 감정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 중앙고 시절까지 철저한 무명이었다가 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스타가 된 것은 정말 엄청난 결실을 맺은 것이지요?
이런 말씀드리면 자기 자랑한다 하겠지만, 솔직히 제가 남보다 노력은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조선대 입학한 후 땀을 많이 흘렸지요. 축구를 어렵게 시작했고, 또 서러움도 많이 받아가면서 공을 찼기 때문에 오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
| 트레이드 마크인 긴 머리 덕에 김주성은 '삼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부산대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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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생마’ 혹은 ‘삼손’으로 불리셨는데, 둘 중 어느 게 더 마음에 드십니까?
처음에 대표팀에 선발된 후 붙여진 별명이 ‘떠오르는 별’이었습니다. 그 후 ‘야생마’, ‘삼손’이었는데, 야생마란 별명은 외국에서 붙여준 별명예요. ‘wild horse’라고 부르더라구요. 제가 만들어낸 별명은 아니지만 세 개 다 마음에 듭니다.(웃음)
- 히딩크 감독을 비롯한 외국 지도자들이 한결 같이 ‘한국 선수들은 양발을 능숙하게 사용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김주성 부장님도 양발을 완벽하게 사용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요? 국내 지도자들이 그렇게 가르쳐서 그런가요?
저도 왼발, 오른발을 별 차이 없이 사용했습니다. 한국 선수들이 양발을 잘 쓰는 건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도자들이 어린 선수들에게 양발을 사용하라고 강조를 하는 것도 있지만 선수들 스스로가 어릴 때부터 깨닿는 것 같아요. 그게 꼭 강요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거든요.
외국의 경우엔 지도자들이 양발 사용을 크게 강요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축구 선수가 양발을 다 잘 사용한다는 건 큰 장점이지요.
- 99년 은퇴 후 박사학위 받으셨잖아요. 어떤 공부를 했습니까?
석사 과정은 한양대학교에서 했고, 98년에 부산 경성대학 교육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을 했습니다. 전공은 스포츠 마케팅이예요. 당시 운동하랴 공부하랴 많은 고충이 따랐는데 팀에서 많은 배려를 해줬습니다. 논문 준비할 때는 하루 3시간 밖에 자질 못했거든요.
제가 99년에 은퇴를 했는데 팀에서는 1년 만 더 뛰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논문 때문에 안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고, 은퇴 후 1년 간은 논문 쓰는 데만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2001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논문 제목은 [프로축구 관여도와 정보 요구도가 정보 탐색 및 구매의도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 대학원 공부까지 한 이유가 있습니까.
학창시절 때부터 축구를 그만둔 후에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수로서 해외를 다닐 때마다 외국어에 대한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선수 때는 공만 차면 되는데 은퇴 후를 생각해 보니까 학문적 지식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은퇴 후에도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하질 않았습니다. 만일 지도자를 하게 되더라도 행정력을 갖춘 지도자가 되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국내 스포츠계를 보면 현장에 있는 분들은 행정력이 부족하고, 또 행정력이 뛰어난 분들은 현장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잖아요. 저는 그걸 동시에 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대학원 가서 공부를 하게 된 겁니다.
- 한동안은 외국에 나가서 견문을 높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미국 유학도 다녀왔고, 유럽 연수도 다녀왔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에 FIFA 주관으로 CIES 마스터 코스라는 게 생겼습니다. CIES가 뭐냐하면, FIFA에서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위스 이렇게 3개국에 위탁을 해서 스포츠 역사(잉글랜드), 스포츠 마케팅(이탈리아), 스포츠 법(스위스)을 가르치는 코스예요. 1년 과정인데 1년 동안 3개국을 돌면서 강의를 듣는 거지요.
매년 세계 각국에서 모인 26~28명의 인재들이 이 과정을 밟게 되는데 저는 당시에 대한축구협회의 추천을 받고, 현지에 가서 영어로 인터뷰를 받은 후에 이 과정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가서 보니까 선수 출신은 저 한 명 뿐이더라구요.(웃음)
국내에서는 제가 처음이었고, 지금은 AFC에서 일하는 박평식 씨가 제 뒤로 이 과정을 이수했어요.
- 자제 분은 몇 명입니까?
91년에 결혼해서 1남(6살) 2녀(15살, 12살)를 두었습니다. 운동하는 애는 없구요.(웃음)
- 선수로서도 대성공을 이루셨듯이 축구 행정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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