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5년 6월 17일 잠실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결승전에서 김정남 감독이 이끄는 월드컵 대표팀과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88대표팀이 맞붙었다. ‘형과 아우의 대결’로도 불리운 이 날 결승전은 변병주가 결승골을 터뜨린 월드컵 대표팀의 1대0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대회 최고의 스타는 단연 88대표팀의 16번 김주성이었다. 당시 조선대학 3학년생이었던 김주성은 이 대회에서 폭발적인 스피드와 화려한 개인기로 축구팬들을 열광시켰고, 축구 관계자들까지 놀라게 했다. 일약 스타덤에 오른 김주성은 월드컵 대표팀에 전격 발탁됐다.
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가 끝난 후, 한 달 뒤인 7월 21일.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인도네시아와의 1차전 홈경기가 잠실 운동장에서 벌어졌다. 이날 김주성은 후반전에 김석원과 교체 투입되어 한골을 터뜨리는 활약을 보이며 A대표팀 데뷔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어 대표팀 최연소로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해 세 게임 모두 주전 멤버로 활약했다. 대회 후에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빛낼 예비스타 10명’에도 뽑혔다. 이를 계기로 한국 축구의 간판 스타로 자리매김한 김주성은 90년 월드컵과 94년 미국 월드컵에 연이어 출전했다.
김주성은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에서 선정한 아시아 최고 선수상을 1989, 90, 91년 세 차례나 수상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그는 아시아 최고의 축구 스타였던 것이다.
1992년에는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보쿰에서 2시즌(92-93, 93-94)을 뛰었다. 94년 부진의 늪에 허덕이던 친정팀 부산 대우(현 부산아이콘스)로 복귀한 김주성은 95년부터는 스위퍼(리베로)로 변신해 97년 팀을 K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아울러 생애 처음으로 K리그 MVP까지 수상하는 영예도 누렸다.
이렇듯 화려하게만 보이는 김주성의 이력 뒤엔 흥미로운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김주성이 중앙 고등학교 시절까지 철저한 무명 선수였다는 것이다. 열혈 올드 축구팬들은 물론 축구인들조차도 중앙고 시절의 김주성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무명이었던 그가 어떻게 최고의 스타로 올라설 수 있었을까. 현재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으로 재직중인 김주성(42)에게 학창 시절을 포함한 현역 시절 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았다.
- 현역 시절을 회고하는 인터뷰는 무척 오랜만이시지요?
1999년 은퇴했을 때 이후 처음인 것 같아요.(웃음)
- 초,중,고교 시절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거의 모르거든요. 그 시절 이야기 좀 들려주십시오.
저는 강원도 출신입니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장산리가 고향이지요. 그 곳에 있는 강현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축구부는 없었고 3학년 때 특별 활동으로 배구를 했어요. 그러다가 축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4학년 때 속초 중앙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6학년 때 축구부 감독님이 저한테 "기왕에 축구를 하려면 한양(서울)에 가서 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6학년 2학기 때 축구부가 있는 서울 성수초등학교로 무작정 전학을 왔습니다. 식구들도 같이 이사를 왔구요. 한마디로 저 하나 때문에 저희 가족이 서울에 오게 된 거지요.
하지만 축구부에는 들어가질 못했어요. 일반적으로 선수들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운동을 시작하게 되고, 그 선수들이 초등학교 졸업해서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로 함께 진학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6학년 때 전학을 왔기 때문에 운동을 할 수도 없었고, 축구 특기생으로 중학교에 진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 그런데 어떻게 축구를 할수 있었습니까?
중학교는 추첨을 통해서 가지 않습니까. 흔히 ‘뺑뺑이 돌려서 간다’고 하잖아요. 제가 운 좋게도 축구부가 있는 성수중학교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축구 선수로서가 아닌 일반 학생으로서 성수중학교에 입학해서 축구부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 축구부에서 쉽게 받아주던가요?
일단은 받아주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키도 작고, 체격도 무척 왜소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독님과 선생님들이 저에게 축구를 그만두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1학년 2학기 때까지는 전혀 공을 차지를 못했습니다. 축구부에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렇지만 축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당시 체육 선생님이시자 축구부장이신 김인수 선생님(현 AFC 심판위원)과 임흥세 감독님에게 “축구를 계속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체육실에 가서 애원하다시피 했지요. 그랬더니 결국 두 분 선생님께서 허락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2학년 때 다시 축구부에 들어갔습니다.
2학년 때까지는 볼보이였고, 3학년 때 겨우 주전 멤버로 뛰게 됐지요.(웃음) 그리고 중앙고등학교로 스카웃이 된 겁니다. |
| 야생마를 연상케하는 질주로 유명했던 김주성. 89년 월드컵 예선 북한전 ⓒK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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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축구계에 중앙고 출신들이 여러 분 계시지요?
네. 정몽준 협회장님, 최종덕 감독님(서산 시민구단), 정해성 감독님(제주 유나이티드)이 중앙고 출신입니다.
- 그 당시 중앙고 전력은 어땠나요?
제가 1학년 때 전국 대회 4강에 한번 들었고, 그 후에는 성적이 안좋았어요. 특히 3학년 때는 선수가 13명인가 14명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무슨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어요.(웃음) 더구나 중앙고는 축구보다는 야구가 더 유명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축구부에 대한 지원이 그다지 좋질 않았어요.
당시 중앙고 감독님이 (김)석원이 형 아버님이신 김찬기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1,2학년 때까지 김찬기 감독님이셨는데 2학년 마칠 무렵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어요.
- 특기자로 대학 입학하기도 쉽지 않았겠는데요?
그렇죠. 아시다시피 그때 고등학교 선수들은 전국 대회에서 4강 안에 들어야 대학 진학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까. 제가 3학년 때 중앙고는 전국 대회 4강 안에 들어간 적이 없어서 그 상태로는 대학을 못가는 거였지요. 다행히 3학년 때 고교 상비군에 뽑혔기 때문에 진학 자격이 주어진 겁니다. 교육부 지침에 의해 상비군에 선발된 선수에 한해서는 대학에 갈수 있는 자격을 주었거든요.
고교 상비군에 뽑히기도 상당히 어려웠어요. 전국에서 100여 명의 선수를 선발한 다음에 여러 차례 평가전을 치룬 후, 최종 20명을 추렸거든요. 그 때 제가 고교 상비군에 선발되면서 장학금으로 50만원을 받았습니다. 축구로 처음 돈을 번 거지요.(웃음)
- 대학 중에서 조선대를 가게 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중앙고 2학년 때 김찬기 감독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시면서 후임으로 장다석 감독님이 오셨는데, 그 분이 전라도 장흥 출신이라 전남 지역에 아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2학년 겨울방학 때 광주에 있는 조선대로 동계훈련을 갔어요. 조선대 축구부와 합동으로 훈련을 한 거지요. 마침 조선대 고규선 감독님이 저를 눈여겨 보셨는지 졸업 후에 조선대로 오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졸업 후에 동료선수 두 명과 함께 조선대로 간겁니다. 당시 조선대가 신흥 강호로 부상할 때였지요.
- 다른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는 없었나요?
아주대, 한양대, 서울대, 그리고 포항제철에서도 오라고 했지요. 그중에 서울대는 그 무렵 축구 특기생을 받던 때였는데 제가 스카웃 제의를 뿌리쳤지요.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서울대 입학을 거부한 사람은 저 밖에 없지 않을까요?(웃음)
- 그래도 꼭 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어렵게 축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저 축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대회 때 같은 또래인 김종부, 신연호, 김판근, 이기근, 이태형 같은 선수가 크게 각광을 받았는데, 부럽지 않았나요?
당연히 부러웠지요. 저도 그 경기들을 TV로 봤는데 우리 선수들이 정말 잘했죠. 특히 김종부, 신연호는 고교 시절부터 대단히 유명했습니다. 저하고는 감히 비교를 할 수 없던 스타 선수들이었지요.
- 김종부, 신연호 선수와 고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셨습니까?
저야 종부와 연호를 알고 있었지만, 그 친구들은 저를 몰랐을 거예요. 두 선수는 당시에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었고 저는 완전히 무명이었거든요. 제가 고3 때 고교 상비군에 선발이 되긴 했지만 그 친구들 수준은 아니었습니다.(웃음) |
| 88 올림픽 아르헨티나전에서 활약하는 김주성 ⓒ 월간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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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멕시코 세계 청소년 대회 때 우리 공격진에 김주성 부장님이 가미가 됐다면 어땠을까요?
당시 우리 청소년 대표팀 공격진이 센터포워드 김종부, 신연호. 이기근, 오른쪽 윙에 이태형. 왼쪽 윙에 이승희가 섰던 걸로 기억 되는데, 그 틈에 제가 들어갈 수 없지요.(웃음)
- 그 이듬해인가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대 2학년 올라갈 무렵이니까 1984년이죠. 85년 세계 청소년 대회를 목표로 청소년 대표팀이 구성이 됐는데 제가 그 팀에 선발이 됐습니다. 제가 실제 나이하고 호적상의 나이(66년생) 하고 조금 다르거든요.
당시 청소년 대표팀 감독이 김삼락 선생님이셨고, 코치는 김기복 선생님이셨습니다. 아시아 예선을 위해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는데 그 나라가 방글라데시였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기억에 남아요. 그런데 예선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세계 대회에 출전하질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 왼쪽 윙으로 뛰었지요.
이후에 오근영 감독님이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으셨는데 그 때도 제가 선발이 됐어요. 그 뒤에 김삼락, 오근영 감독님이 저를 박종환 감독님에게 추천을 해주셔서 제가 88대표팀에 선발이 된 겁니다.
- 당시 88대표팀에서 김주성 부장님의 비중은 대단했습니다. 폭발적이고 박력있는 플레이에 축구팬들이 크게 매료가 됐는데요.
88 대표팀에 선발됐을 때 너무도 기뻤습니다. 88팀은 멕시코 세계 청소년 대회 4강 주역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젊은 팀이었죠. 국가대표팀은 아니었지만 88대표팀도 어쨌든 성인 대표팀이잖아요. 그제서야 비로소 태극마크를 단 게 실감이 나더라구요.
88대표팀에 선발이 되고나서부터 이름이 조금씩 알려졌고, 85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를 통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습니다. 그 대회 결승전이 멕시코 월드컵에 나가는 국가대표팀과 올림픽에 대비한 88대표팀의 대결이었는데, 저희 88대표팀이 1대0으로 졌지만 관중들은 88대표팀을 더 많이 응원해 주셨어요. 그때 88대표팀의 인기가 참 좋았습니다.
- 그 대회 후에 바로 국가대표팀에 선발이 되신 거지요?
네. 한 달 뒤에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예선 인도네시아와의 1차전이 잠실 운동장에서 있었는데 그때 제가 A대표팀 데뷔전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2 대 0으로 이겼는데 제가 교체 멤버로 들어가서 한 골을 넣었지요. 당시 주전 레프트 윙으로 뛰던 김석원 선배가 무릎에 부상이 있어서 제외되는 바람에 제가 그 뒤부터 주전 자리를 찾게 되었죠.
- 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서 주전 멤버로 활약을 했습니다. 대표팀에서 가장 막내였는데 힘든 점은 없으셨습니까?
힘든 점은 없었고 오히려 편했어요. 선배님들이 정말 잘 해주셨거든요. 당시 최고참이 차범근 선배님이셨는데 저하고 열 살이 넘게 차이가 났어요. 저는 막내이다보니 선배님들보다는 부담감이 덜했습니다.
- 월드컵에 출전해 보니까 어떻던가요?
분위기가 국내와 정말 다르더군요. 멕시코는 축구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현지에 가보니까 그 열기와 열정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분위기 자체가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거예요. 월드컵 개최국이라서 그런게 아니고 그 쪽 사람들은 축구를 하나의 문화로 생각하고 있더라구요.
한국 축구와 세계 축구의 수준 차도 절감했지요. 사실 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한국 대표팀의 목표가 16강 진출이었지만 냉정히 말해서 참가하는 데 의미를 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월드컵에 대한 확실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월드컵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되고, 또 어떻게 훈련을 해야 되는지 등 모든 게 파악이 안된 상태였거든요. 정보도 물론 없었구요.
저희 선수들은 맞붙는 상대팀 선수들 중에 세계적인 선수 이름 한 두 명 정도 아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니 16강 목표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 조별리그 세 게임에 모두 선발 출전했고,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대회 후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빛낼 예비스타 10명’에도 선정되셨습니다.
그저 정신없이 뛰다 보니까 그런 좋은 평을 받은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막내였기 때문에 다른 선배님들 보다는 부담감이 덜했어요. 그러다보니 편한 마음으로 뛸 수 있지요. |
| 대우 시절의 김주성(오른쪽). 왼쪽은 김평석 ⓒ 월간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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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7년 조선대 졸업 후 대우에 입단했는데 그때는 드래프트 제도가 아니었지요?
네. 자유계약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엔 유공과 계약을 했다가 파기를 했습니다.(웃음)
제가 날짜까지 잊지 않는데, 85년 1월 1일에 부산 구덕 경기장에서 문정식 감독님이 이끄는 월드컵 대표팀과 저희 88대표팀의 평가전이 있었습니다. 그 날 88대표팀이 제가 결승골을 넣으면서 월드컵 대표팀을 2대1로 이겼어요.
경기 후 유공에서 마련한 봉고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유공 사무실에서 계약금 4.000만원에 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졸업할 때까지 월 100만원씩 용돈을 유공으로부터 받기로 했구요. 당시로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유공하고 학교(조선대)에서 추진을 한 건데, 유공 측에서 당시 2학년이던 저의 장래성을 좋게 평가했던 것 같아요. 미리 계약을 하자고 하더라구요. 물론 계약은 비밀리에 했습니다.
그 무렵에는 에이전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계약은 구단과 선수 개인이 했어요. 그 때 저는 계약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을 때라 다른 생각을 별로 안하고 있었는데, 저희 어머님은 무척 조심스러워 하시더라구요. 계약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건데, 법적으로 대학교 3학년 되기 전까지는 프로팀과 계약을 못하게 되어있더라구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유공 구단에게 계약을 파기하자고 했어요.
그러자 유공 구단에서 난리가 났지요. “아무리 법적으로는 계약을 못하게 되어 있더라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냐?”면서 “만일 계약을 파기하려면 위약금으로 계약금의 두배를 물어내라”고 하더라구요.
유공 입장도 제가 이해를 합니다. 구단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나지요. 이 일 때문에 그 무렵 조금 시끌벅적했어요.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되질 않았을 뿐이지요. 결국 제가 위약금을 물어주고 유공에서 저를 풀어주는 것으로 끝이 났지요.
유공과의 문제가 해결되자 이후에 대우와 포철에서 저를 영입하겠다고 나섰는데 특히 대우에서 매우 적극적이었어요. 그때는 제가 대학교 3학년이 됐기 때문에 프로팀과 계약을 할 수 있게 됐거든요.
제가 청소년 대표 시절에 대우하고 연습 게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에 제 이름이 조금씩 알려졌던 것 같아요. 대우와 연습 게임을 하는 날, 안종복 단장님(현 인천 유나이티드 사장)이 제가 뛰는 모습을 직접 보러 오셨습니다. 안종복 단장님이 경기를 본 후, 저를 영입하겠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대우와 계약금 1억원을 받고 계약을 한 겁니다. 계약금 1억원을 받은 축구 선수는 국내에서 제가 최초일 거예요.
- 당시 대우는 호화 군단이라 불리었죠.
박창선, 조광래, 이태호, 정해원, 정용환, 변병주 등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계셨지요. 그래서 제가 더더욱 대우에 가고 싶었던 겁니다.
- 1987년 입단 첫 해에 28 경기/10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하면서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신인상까지 수상했습니다. 베스트 11에 선정되었구요.
아무래도 훌륭한 선배님들과 호흡을 맞추다보니까 그렇게 좋은 결과를 낸 것 같습니다. 선배님이 잘 이끌어주니까 축구하기가 참 편했어요.
- 동갑인 김종부, 신연호, 이기근 같은 공격수들도 같은 해 프로에 입단을 했는데 라이벌 의식은 없으셨는지요?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선수들이 잘 되길 바랐어요. 워낙 자질이 뛰어난 선수들이었으니까요. 다같이 잘하면 좋잖아요. 그 중에서 이기근이 프로에서는 가장 좋은 활약을 보였지요. 득점왕도 두 차례나 했구요.
그런데 큰 기대를 모았던 종부는 스카웃 파동을 겪으면서 마음고생을 꽤 했지요. 저도 유공과 계약을 했다가 깨졌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종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만일 종부가 그런 문제가 없었다면 정말 좋은 활약을 보였을텐데 안타깝습니다. 연호도 부상 때문인지 프로에 와서는 기대만큼 활약을 못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선수들이었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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